본문 바로가기

think/review

토지 마지막 권 中에서...

 

 

 

 

 

 

 

 

 

 

찬하는 발길을 옮겼다. 명희는 말뚝같이 길 위에 서 있었다. 

조찬하와 오가타는 환국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찬하가 급한 걸음으로 오가타를 따라잡았을 때 굳어버린 듯 오가타는 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찬하를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음에도, 옆에서 일의 전말은 알고 있었지만 찬하는 오가타에게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은 굳이 비밀로 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찬하의 교양에 속하는 일인 듯싶었다. 보여지는 것을 감추려 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감정에 대한 설명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타는 가장 첨예하고 가장 절망적인 바닷가에서의 사건을 목격했으며 부서지고 깨어지는 찬하의 모습을 보았다. 한 사나이가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오가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찬하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낭패를 했으면, 얼마나 자신이 처참했으면 인실과 오가타를 낯선 항구에 내버려둔 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떠나지 않았던가. 그것은 또하느 오가타에게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꿈같이 인실과 맺어졌고 아들 쇼지와 이어진 진하고도 끈끈한 인연의 줄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타는 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오가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했나? 사람들은 뿌리 뽑힌 잡초같이 전쟁에 쫓기고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오가타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인간의 삶은 찬란한가, 신비스런 것인가, 지층을 울리며 지금도 어디선가 지나가고 있을 군화 소리, 개미떼같이 지나가는 그것을 찬란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헐벗고 굶주리며, 생면부지의 인간들이 이유 없이 서로를 서로가 죽이며 벌레처럼 하찮게 죽어가는, 도시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진 드라마인가. 
                                                          -제 5편 빛 속으로!  5장 동천(冬天)

 

 

 

그러나 그것은 다 부질없는 말이었다. 조찬하나 윤국이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찬하는 자신의 염원을 형이 가로지를 것을 예기치 못했으며 윤국은 자신과 양현이 앞에 홀연히 나타날 송영광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들 네 사람뿐만 아니라 명희나 양현에게도 그들에게 허용된 시간의 짜임새는 실로 기기묘묘하면서도 잔혹했다 할밖에.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는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과 자리,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제 5편 빛 속으로!  5장 동천(冬天)

 

 

 

 

모두 힘들게 살아왔고 비극적 삶을 끝낸 사람들도 많지만 어찌하여 그다지도 불행의 여신은 석이네 식구들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가. 절망적인 파도를 넘고 넘어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인생이 엄숙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만 본능적인 삶에의 욕구, 죽음이 두려운 때문인가, 전생의 업을 같기 위한 때문인가? 그렇다면 남희는 전생에 무슨 악행을 범했더란 말인가. 사냥감같이 잡혀서 전선으로 보내어지는 조선의 순결한 딸들은 어떤 업을 짊어졌기에 일본군대 야수 같은 몸뚱이 밑에서 살이 썩어가야만 하는가. 대체 조선 민족은 일본 민족에게 갚아야 하는 죄업이 무엇인가. 개인 하나하나의 행로를 바꾸어놓은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 침략의 그 마성을 적자생존이라는 이른바 지식인들의 논리로 진정 마감해야 하는 건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악이 힘이라면 선도 힘이요, 공격이 힘이라면 방어도 힘이다. 악의 승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네들은 지금 공중에서 찢기어 살점들이 흩어지고 옥쇄! 옥쇄! 전멸! 전멸! 막 스스로에 의해 지옥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남희는 걷고 있다. 간호부가 되겠노라 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여전히 시간을 따라가듯 무디고 무감각인 양 걷고 있는 것이었다. 
                                                                   -제 5편 빛 속으로!    6장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