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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review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가벼움에 대해...

 

 

 

 

 

Unbreable Lightness of Being.

 

처음 우리말 제목을 들었을 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 줄 알았다.

프랑소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good bye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데 알고보니 <슬픔이여 안녕>이 '안녕? 슬픔 (Bonjour, Tristtesse)'이었던 것처럼,

이 책은 '참을 수 없는' + '존재의 가벼움' 즉,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떠오른 대화 주제가 있었는데

근본적으로 happy한 사람과 unhappy한 사람이 있다는 주제였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행복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인데도 모든 게 부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도 힘든 것보다는 잠시 잠깐 주어지는 기쁜 일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도 있다는 것.

 

처음엔 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사람은

밀란 쿤데라가 말하듯이 삶을 더없이 무겁게 느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저런 상황에 저렇게 즐거워보일 수 있지'한 사람은

삶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늦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를 가볍게 느낀다는 게 삶을 '심각'하게 살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주위의 다른 것들을 지나치게 무겁게 보는 바람에

그와 비교해 자기 자신을 가볍게 보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사는 것을 한없이 덧없게 느끼는...... 존재의 무게가 없는......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자신을 happy하게 여길 수는 없을 것 아닌가.

 

따라서 '존재의 가벼움'이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케세라세라 Que sera sera'처럼 여겨서일 수도 있겠지만

불행한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저 책을 처음 읽을 때는,

테레사는 '존재를 무겁게' 여겨서 무거운 삶을 살고 무겁게 세상을 떠난 unhappy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사비나는 '존재를 가볍게' 여겨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happy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사비나가 정말로 happy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든다.

 

 

 

 

 

 

 

처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을 때 난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일년 365일 중 300일 이상 해가 내려쬐인다는 남프랑스 지중해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곳에서 나는 한없이 가볍고 즐거웠던 반면,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그 가벼움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좋은 곳에 있는지의 여부는 내 행복지수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혼자서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도 별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 외로움만 더욱 커졌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무엇을 하고 누구와 있느냐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