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배 언니가 한 얘긴데요. 남녀동등주의의 여자들 꼴불견이라는 거예요. 물 빠진 나무막대기 같은 여자라 혹평하면서 그들 주의나 사상에는 인간에 대한 휴머니티의 뒷받침이 없고 에고이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 처지에 대한 불만, 원망, 열등감 그런 것 때문에 핏대를 세우거나 아니면 시류를 좇아가는 의식화되지 못한 경박함, 해서 자칫하면 여성의 특성이 향상되기보다 말살되는 결과가 된다, 남녀는 다 같이 서로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동시에 남자 제일주의, 뽐내는 남자들은 여자를 소유물로, 종으로, 아이 낳는 존재로 생각하며 사사건건 여자가, 여자 주제에, 그런 남자 치고 잘난 사람 없다 그런 말도 했어요. 남녀동등을 부르짖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로서 자신이 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그런 남성에게 있어서 여자의 존재야말로 자부심의 마지막 보루 같은 거래요. 해서 그거나마 허물어질까 봐서 전전긍긍 필사적이며 관에서 매 맞고 집에 와서 아내 치는 사내가 옛날에도 못난 사내의 대명사 같은 것은 아니었나, 독설이 심하지요? 저도 얼마간 그 말에는 동감입니다. 그건 남성 여성의 구별에서 제기되는 것이기보다 인간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약자니까 나보다 약한 자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리, 일종의 잔인성이라 할까요? 부당한 독재자나 암우한 군주가 살생을 일삼는 것도 바로 그 심리 때문일 거예요. 비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사이에도, 일본을 보세요. 그 나라 유산이라곤 칼 쓰는 것밖에 없지 않아요? 참으로 열등감이 치열한 민족이에요. 그네들이 일등국민 일등국민 하기 위해, 일등국민이 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살육을 계속할 거예요. 나는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 제 3편 명희의 사막(砂漠) 3장 대면(対面)
'오빠는 신사다. '
올케에 대하여 불만이 있거나 경멸할 때 인실은 곧잘 마음속으로 오빠는 신사다, 하고 뇌곤 한다. 호기심이 강하고 감정을 종잇장처럼 발라대는 여자, 어쩌다 하나를 알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아버린 듯 난 체하는 여자, 어려운 단어 하나로 유식함을 자처하고, 하긴 단순하여 악랄함은 없다. 그런 모든 단점을 감싸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유인성의 커다란 품, 인실은 오빠의 그런 남자다움을 존경하면서도 올케를 싫어하였다. (중략)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가는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기를 두 번, 겨울밤은 길었다. 바람은 스산하게 들창을 흔들었다. 경찰관의 사벨 소리를 연상케 하는 한밤의 바람 소리, 기분 나쁜 그 소리, 오렌지빛 안개 같은 빛을 발하는 발가숭이 전등이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던 유치장 밖에서는 늘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었따. 어찌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유치장의 문은 육중하였고 열쇠 꾸러미의 소리도 육중하였다. 몇밤을 잠자지 못하게 하며 취조하던 일인 형사의 얼굴, 십 리 가다 한 오라기 오리 가다 한 오라기, 며칠을 면도하지 못했을 때 유황 같이 누리끼리한 안면에 돋아났었던 수염, 그 얼굴은 공포 이외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피를 느낄 수 없는, 벼랑과 같은 절망적 얼굴이었따. 그러나 어떤 순간, 그것은 꼭 한 번이었었지만 그 얼굴을 불행의 표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인실에게 매우 중요한 심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의 학살을 목도하였던 유인실은 피해자가 갖는,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저항의식을 불태웠다. 그것은 부러질 것만 같은 가파로움이었다.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다. 피해자의 체념, 피해자의 굴복이야말로 피해자의 패배로써 그들의 승리와는 관계없이 패배할 뿐이라는 사실, 적이 누구이든, 설령 적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인실은 책에다 마음을 집중하려 했다. 꽁꽁 얼어붙은 길이, 그 길이 걸어와 마음 바닥에 깔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외로움.
- 제 3편 명희의 사막(砂漠) 5장 사랑
'언제 내가 여기 왔지?'
무릎을 세우고 두 팔의 힘을 빼며 인실은 무릎 위에 얼굴을 얹는다. 이 순간 이전의 시간과 장소가 까마득하다. 이 순간 이전에 있었떤 일들이 바람에 날려간 손수건처럼, 마치 머나먼 곳에서 까무러칠 듯이 사라질 듯이 깜박거리는 별빛처럼 아득하다. 오빠의 얼굴, 조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는데 윤곽이 잡히지 않는다. 자맥질하듯 희미한 윤곽이나마 사라지곤 한다. 기차를 타고 연락선, 또 기차를 타고 남의 땅 동경에 도착하여 하숙집 다다미 석 장짜리 방에 앉는 순간에도 번번히 그랬었다. 형무소 감방에서도 지금과 같은 의식상태를 체험하였다. 그것은 단절감이었다. 시간이며 공간, 사건들이 말끔히 지워져버리는, 그 아무것도 존재했을 것 같지 않는 당혹함과 상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까지 상실감은 스며들어온다. 전등갓에서 우산같이 내려오는 불빛 아래 웅크리고 앉은 한 여자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방바닥이며 벽면, 천장, 자신을 둘러싼 광경이 과연 현실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머나면 지평선 같은 시간 그 자체는 대체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공포, 지금 몽롱한 의식의 흐름은 그런 공포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심장 한복판을 뚫고 바람이 설렁설렁 지나가는 것 같구나.'
외로움은 아니었다. 우수도 아니었다. 생과 사의 혼돈, 이승과 저승의 구분이 없어진 상태, 목적도 의미도 없어진 상실 그 자체, 인실은 강한 몸짓으로 그런 상념을 떠밀어내듯 일어섰다. 세면도구를 들고 방을 나섰다. 밖은 어둑어둑했으나 유리창을 통해 불빛이 새나왔기 때문에 물통과 그 옆에 놓인 놋쇠 대야를 볼 수 있었다. 뒤뜰은 마름질하다 남은 자투리처럼 기다란 사다리꼴의 좁은 공간이었다. 판자 울타리 너머 왜식 목조건물에서도 불빛은 새나오고 있었다. 인실은 놋대야를 두 번 헹구고 나서 세숫물을 부었다.
- 제 3편 명희의 사막(砂漠) 9장 선비와 농민, 무사와 상인
-- 예를 들자면 많겠지만 양쪽의 모든 것은 그와 같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정신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당신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에 일본인은 용기가 있고 조선인은 나태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인데 사실 조선은 헤일 수 없이 많은 외침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나라를 잃은 적은 없었어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던 거예요. 만일 일본이 섬나라 아닌 조선과 같은 조건의 국토였다면 어땠을까요. 당신네들이 외국 함대에 눌려 문호개방을 했지만 조선은 물리쳤습니다. 무력으로 문호개방이 안 됐던 거예요. 조선이 넘어간 것은 무력에 의했다기보다 계략에 넘어갔지요. 그리고 오늘 조선의 처지를 일본의 처지라 가상한다면 그렇게 치열하게 끈질기게 저항했을까요? 당신네들은 내심 무서운 거예요. 중국에서, 만주에서 연해주, 미국, 또 일본 내에서 조선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잇는 독립투쟁, 당신네들의 야만적인 탄압은 공포에서 오는 거예요. 거듭되는 학살은 당신네들 공포의 표현입니다. 당신네들이 용기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닌 잔인성이에요. 어처구니없이 미화된 셋푸쿠에서 난 그것을 느낍니다. 잔인성, 길들여진 잔인성 말입니다. 일본인의 본성이 잔인하다는 게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길들여온 잔인성이란 것이지요. 그러면 왜 길들여졌는가. 반문하게 되면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용기, 그것이 애매해지지요. 자살에는 물에 빠져 죽는 것, 약을 먹고 죽는 것, 목을 매달기도 하고 이마나 가슴팍에 총을 쏘아 죽고 목이나 가슴을 칼로 찔러서 끝내는 일, 자살도 가지가지인데 배를 갈라서 내장이 쏟아지는 죽음, 생선, 산짐승, 동물의 경우를 두고 생각할 때 내장이 나오는 것은 죽음 후의 일이지요. 사람을 포함하여 동물에게 가장 더럽고 추악해 보이는 것이 내장이에요. 배를 갈라서 내장을 드러내 죽는 방법은 그래서 가장 추악한 거 아니겠어요? 그것을 의식화하고 미화하는 이유가 뭐죠? 그야말로 야만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따라서 사람에 틀림이 없는 천황이 현인신도 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가치전도, 전도된 진실에 순치되어온 일본인은 비극이라는 감각도 없는 채 비극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 약탈의 도구며 장치예요. 보다 높은 곳을 향하는 이상이나 고매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와 같은 도구 장치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당신네 나라에 사상이 없는 거지요. 당신네 나라에 사상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문화가 빈곤한 것도 말예요. 민족주의도 없구요. 애국이라는 말을 빌린 공범의식, 당신들의 애국심은 공범의식이지요. 유일하게 아름다운 죽음이 있었다면 도회령에 의해 순교한 나가사키의 천주교도, 그들의 죽음뿐일 거예요."
순간 오가타는 몸을 퉁기듯 놀라며 인실의 옆모습을 본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오가타는 언젠가 자신도 도회령에 의해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일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 제 3편 명희의 사막(砂漠) 9장 선비와 농민, 무사와 상인
'think > scribb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에서 비비고 만두를 사다! (0) | 2021.02.11 |
---|---|
신칸센 비용과 일본인의 사고 (0) | 2021.01.20 |
生死의 瞬間 (0) | 2020.11.25 |
가을, 책 한 구절 (0) | 2020.10.13 |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0) | 2020.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