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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scribble

生死의 瞬間

 

'답댑이, 불 앞에 아아 앉히놓은 것맨치로 늘 걱정이구마.'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또렷하고, 바위의 파아란 이끼 빛깔도 선명하다. 수술이 끝난 뒤 의식을 회복했을 때 홍이 맨 먼저 생각한 것도 그 일이었었다. 금지옥엽, 목심겉이 니를 키운 월선이도, 저승이사 멀다 카지마는 영신은 오고 간께, 판술네 말이 새삼스럽게 폐부를 찌른다. 그리고 그 환영에 대한 이야기가 쉽사리 입 밖에 나오지 않는 까닭이 무겁게 가슴을 내리지른다. 왜 순순히 말 못하는가, 꺼릴 것이 조금도 없는데. 잊는다는 것, 잊고 싶어한다는 것. 화창하게 열려 있떤 봄날이 시든다. 개나리 진달래의 맑은 빛깔이 검푸른 수박색 이끼로 변한다. 그늘이 드리워지고 음산해지고 찌꺼기가 수없이 내리앉으며 마음이 머들거린다. 영팔노인 내외로부터 차츰 차단되어가는 자신을 홍이 느낀다. 나는 무엇이며 저쪽은 무엇인가. 이쪽과 저쪽의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항구불멸이 아니다. 어느 땐가 사람은 사람을 잊게 되고 또 버리게 된다. 살아서 등을 돌리며 이별도 배신도 하게 되지만 죽음으로 철저하게 인간은 인간을 배신한다. 마음이 가면 육신이 가고 육신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진다. 마음이 매달려 있다는 것은 착각이며 자기 기만은 아닐까. 멀고 먼 저승길은 진실로 있는 길인가.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사람은 서러워하고 서러워하다가 잊는 것일까. 지난 정월 병원에서 죽어 있는 상태,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홍이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고 캄캄한 밤, 어두운 안개조차 그곳에서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지(停止)의 상태, 결코 그것도 아니었다. 완전히 없는 것이었다. 머나먼 저승길 같은 것, 없는 것이라면 슬퍼하다 잊었다고 배신의 자책감 같은 것 느낄 필요는 없다. 

                                                                                                         - 토지 13. 4부 1권, 제 1편 삶의 형태, 16장 성환어미의 후일담 中

 

 

 

"내가 이곳에, 어떻게 와 있는 거지요?"
연극 영화의 그 흔해빠진 대사를 또 되풀이하는구나,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으로 명희는 시선을 올렸다. 
"전혀 모리겄십니꺼?"
"글쎄...... 아마 댁이 나를 구출한 모양이지요?"
"아야간에 몸부터 추시리고 나서, 이야기는 차차 하입시다."
명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린다. 전혀 모리겄십니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물론 이 사내가 나를 구해주었구나, 하는데 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어젯밤, 그러니까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멀리서 닭의 홰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인 것 같다. 명희는 눈을 떴다. 맞은켠 벽에 남폿불이 있는 것을 비로소 인식한다. 어젯밤 자정이 지났을까? 방파제 끝에서 몸을 날린 순간까지는 똑똑히 기억에 살아난다. 찝찔한 바다냄새, 눅눅한 바닷바람도 감각 속에서 되살아난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음흉하고 날쌔며 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의 덩어리보다 어둠은 더욱 음흉하고 잔학한 운명의 괴수만 같았다. 운명을 믿지 않으면서, 그러나 명희는 밤도 아니요 낮도 아닌, 어쩌면 시간까지 없는 곳에 내던져진 것이 자신의 운명일 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치열한 미움이라도 있었더라면, 때때로 엄습해오는 구토증, 산다는 것이 혐오스러울 뿐, 그것도 통증을 아니며 멀미 같은 것이다. 실낱 같은 희망은 밤하늘의 별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다 쪽에서 깜박거리는 고깃불에 희망 같은 것이 아주 경미하게 흔들렸을까? 그 흔들림을 느끼는 순간 명희는 투신자살을 결행했던 것이다. [중략] 사나이는 뒷걸음질치듯, 방을 나갔다. 사람의 목숨을 구해준 득의는커녕 풀이 죽고 당황해하는 태도였다. 눈을 감은 채 명희는 절실하게 고마울 것도 없고 원망스러움도 없이, 그러나 왠지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남의 신세를 지는 데 대해선 신경질적일 만큼 부담을 느꼈었던 명희가 그 부담의 짐을 어디다가 부려놓고 온 것과도 같이. [중략] 난간을 꼭 잡지 않으면 몸의 중심을 잡기 어려울 만큼 배는 흔들렸으나, 또 멀미가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명희의 멀미란 일상이었다. 항상 그는 멀미 같은 것, 구역질 같은 것을 느끼며 지내왔었다. 배를 탔기 때문에 일어난 증세, 그러나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증세였었다. 얇은 블라우스가 축축이 젖을 만큼 습기와 소금기 머금은 바람은 명희의 머리칼을 산란하게 흐트러뜨리며 불어오고 또 불어온다. 뱃전에 부딪는 파도같이 지겹게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섬도 눈에 띄지 않는 수평선이 아득하다. 그 아득한 수평선을 향해 가던 과부연락선. 조선에서 일본으로 일본서 조선으로 오가던 시절은 어느덧 십여 년, 그 뒷전으로 떠밀며 가버리고 휴지 조각처럼 흩어져 가버리고, 명희는 아기 울음같이 울며 나는 갈매기를 바라본다. 시각이 단절되어 마치 송곳 끝같이 마음을 찌르며 달아나는 것 같았다. 저 갈매기가 방금 물어 올려서 삼켜버린 생선의 달콤함이나 나비같이 떠 잇는 돛단배의 햇살은 한 찰나이건만 진정 그것은 삶인가. 삶이 한 찰나라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다. 차라리 없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세월은 앙금같이 마음에 쌓이는가. 

                                                                               - 같은 책, 제 2편 귀거래, 5장 사랑은 창조의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