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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8권 발췌_옛사랑, 그리고 일본인의 성향

 

 

 

 

 

 

神楽坂에서 언젠가... (본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거대한 총독부 청사, 그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을 등 뒤로 하고 걸어 내려온 명희는 서대문쪽에서 나타난 저차에 올랐다. 불및은 환했으나 전차 안에는 드문드문 승객들이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앉을 자리는 있었지만 명희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차창 밖 서울의 겨울밤을 내다본다. 
   '그 몰골을 하구서, 살아 있는 것이 기적만 같은 그 몰골을 하구서 평화스럽고 밝은 웃음이, 이상하다, 이상하다.'
   건물에서 기어나온 불빛이 보도 위에 깔려 있었다. 건물에서 기어나온 불빛에 따라, 오렌지색 연갈색 진회색 등으로 보도는 얼룩져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빛은 어둠 같았고 어둠은 빛 같았다. 그리고 골짜기에 등불 하나가 가고 있었다. 명희는 혼돈하면서 흐러져가는 의식을 곧추세우듯 매달린 손잡이를 얼굴 중심에 놓고 발돋움하며 몸의 균형을 잡아본다. 그래도 눈앞에는 골짜기에 등불 하나가 가고 있었다. 
   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많지 않았다. 화신백화점 앞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화점의 임자가 친일파든 아니든 간에 조선의 소시민들의 자존심 같은 화신백화점에서 새나오는 불빛은 황황했으나 어떤 적요감이 감돌고 잇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시, 구매력이 감소된 것도 사실이며 그보다 현저히 나타난 것은 물품의 기근이다. 사람들은 어디 어느 상점에서 생필품인 무엇을 팔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곳으로 왕창 몰려갔고 그러고 나면 그 상점은 잠잠해진다.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은 암시장을 찾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맬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일 관공리, 권력 있는 자들은 모든 귀한 물품, 생선이며 버터 치즈에 이르기까지 배급을 받으니 그들만은 전시 밖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암시장에 가면 값이 비싸 그렇지 대개의 것은 다 구할 수 있었다. 

 

                                 토지 18권, 제3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1장 소식(消息) 中

 

 

양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무런 감동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분을 사랑하고 계세요?"
마치 기습과도 같이 양현이 물었다. 명희는 몹시 당황했다. 그 물음에 당황했다기보다 그 물음으로 하여 자기 자신이 들여다본 자기 감정 때문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대답하기가 난처하군. 그런 일은 좀체 잊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직하게 말해서."
양현은 군밤을 집었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집어들고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 그 행위는 먹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 성싶었다. 

 

                              토지 18권, 제3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1장 소식(消息) 

 

 

 

 

 

 

 

 

箱根. 이것도 본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시다의 광란하는 모습이야말로 일본인의 실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질고 심약한 자도, 양심을 운운하고 도덕을 논하는 자도, 부자 빈자 할 것 없이, 유식한 놈이나 무식한 놈 가릴 것 없이 일본인은 거의 모두가 신국사상(想) 현인신(現人神)에 대한 광신자들인 것이다. 일본에는 투철하게 진실을 탐구하는 지성이 없다. 만세일계(系), 현인신이라는 황당한 그 피막을 찢고 나오지 않는 이상 그 땅에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고 지식인은 말라버린 샘터와도 같은 심장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어째서 섹스의 왕국인가. 말라버린 샘터를 채우기 위함이요 그나마 진실과도 같이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가 말했고 20년대에 유행한 바 있는 에로, 그로, 난센스, 말할 것도 없이 그로테스크는 칼, 피, 괴기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에로티시즘과 상합하고 무의미의 결과를 낳는다. 그 세 가지야말로 일본 문학기 변함없이 되풀이해온 주제다. 높게는 탐미주의 문학이요 낮게는 육체문학이다. 그 땅의 역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가두어왔다. 아무리 석학이라 해도 진리에 봉사하는 것은 차선이요 이른바 일본 국체에 관한 한에 있어서 그것이 반진실(反眞實)임이 명백함에도 이론적으로 날조 조작에 동참하는 것이 그들 석학들의 절대선이요 최고 지상의 사명인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서 진실은 언제나 서슴없이 필요에 따라 우그려놓는 구리 그릇과도 같은 것이며 그들에게는 역사의식이 없다. 종교나 철학이 발붙이지 못하는 것이 그 땅이다. 자체적으로도 그렇다. 소위 신의 말이라는 것이 도요아시하라(豊芦原)는 영원히 내 자손이 통치한다, 그러니까 상속문제 이외는 달리 말이 없는 신도(神道)에다가 다시 말하자면 종교로서 갖추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도에다가 신불습합(合)이니 신유습합(合)이니 하면서 불교와 유교를 끌어다가 신도에 접을 붙이려고 애썼지만 결국 허사였고 명치 이후신도는 도덕이니 조상숭배니 모호하게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 그 땅의 실정이다. 지성이 진리에 봉사하지 않는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한두가지, 에도시대 후기, 국학자 사대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가 있는데 신대문자라고 들고 나온 것이 한글과 흡사한 것이었고, 그는 이것이야 말로 일본의 신대문자로서 조선에까지 전달이 되어 언문이 되었노라 강변했고 일본의 저명한 언어학자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郎)는 그의 연구 저서 <일한양국어동계론>에서 조선어와 일본어는 동일 계통의 언어로서 조선어는 일본어의 한 분파에 불과하며 그것은 마치 유구어와 일본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 했다. 그 저서는 영역까지 해서 내놨는데 그 저의는 뻔한 것이다. 그는 진실을 탐구하고 학문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고 다만 국책에 순응했던 것이다. 날조하고 기만하는 것도 소위 현인신을 정점으로 하는 국체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진실이요 도덕인 것이다. 우리는 저 유명한 1928년 3월 15일을 기억한다. 그 연월일은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날의 공산당 검거선풍은, 보통선거에 임하여 공산당이 내놓은 정책 중 첫머리에 군주제 철폐! 특히 그것에 기인한 것으로 현인신의 광신자들에 의해 그날을 기하여 공산당은 철저하게 고립 무원 속에서 함몰되고 말았다. 
    반전론자 반군주제를 주장하는 자는 그 땅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 같은 틀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할 수 있는 언론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에 있었떤 일인데 동경이라 했던지, 아무튼, 서양 포로가 실리어 가는 광경을 본 어느 여인네가 
    "오카와이소니(お可哀想に)."
    했다고 해서 일제히 신문들이 두들기고 나선 일이 있었다. 소위 히코쿠민(非国民)이라고 무섭게 몰아댄 것이다. 식민지인 조선, 진주에까지 그 소문이 날아들었으니 여론의 비등이 얼마만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얌전하고, 카와이소라는 말에 오 자를 붙였으니 필시 얌전한 여자였을 것이며, 인정 많은 그 일본여자는 어찌 되었을까? 남경 삼십만 대학살에 대해서는 구린 데 뚜껑 덮어놓고 견디면서 한 여인의 인간적 연민을 국적(國賊)으로 몰고 불충자로 매도하는 그 왜소함이여. 하기는 언론계가 군국주의의 첨병이니 말해 무엇하리. 지금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희극도 바로 그런 것이다. 이시다는 교육자도 선생도 아니고 천황폐하의 첨병(兵)인 것이다. 

                   토지 18권, 제3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4장 적(赤)과 흑(黒) 中